우주로 날아가는 영화인 줄 알았는데, 끝나고 나서 남은 건 딸한테 전화하고 싶다는 감각이었다, 어쩌겠어.
1왜 이 영화를 봤는지 — 솔직히 오래 미뤘다
인터스텔라는 나한테 오래 미뤄둔 숙제 같은 영화였다. 개봉했을 때 주변에서 다들 난리가 났는데 그때 나는 왠지 안 봤다. 이유가 딱히 있는 게 아니라 그냥 타이밍을 놓쳤다고 해야 하나. SF 영화라는 장르 자체가 좀 부담스럽기도 했고, 러닝타임이 거의 세 시간이라는 것도 선뜻 안 당기게 했다. 뭔가 공부해야 할 것 같은 느낌 있잖아, 우주 물리학이 나오는 영화는.
그러다가 어느 날 유튜브 알고리즘에 걸렸다. 인터스텔라 영상 메시지 장면 클립이었는데, 맥락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 장면만 딱 봤는데 진짜 눈물이 났다. 뭔지도 모르면서 눈물이 났다는 게 황당하면서도, 이 영화를 지금 당장 봐야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바로 봤다. 세 시간짜리 영화를 밤새 끝냈다.
처음 볼 때는 솔직히 중간에 멍해지는 부분들이 있었다. 상대성이론이니 웜홀이니 블랙홀이니 하는 개념들이 쏟아지는데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근데 끝까지 보고 났더니 그 과학 개념보다 훨씬 다른 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바로 이틀 뒤에 두 번째로 봤다. 두 번째에 이 영화가 제대로 보였다, 어쩌겠어.
2보기 전 기대 vs 실제로 본 느낌
기대는 영상미였다. 우주 배경이면 당연히 화면이 예쁠 거고, 스케일이 크겠지 싶었다. 어벤져스 같은 영화는 아니더라도 그 정도의 볼거리 위주 영화겠거니 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다크나이트 정도의 느낌이겠지 생각했다. 그러니까 잘 만든 액션 SF, 거기서 크게 벗어날 거라고는 예상 못 했다는 거다.
근데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게 우주 영화가 아니라 부녀 영화라는 걸 알게 됐다. 쿠퍼와 머피의 관계가 이 영화 전체를 끌고 가는 엔진이었다. 우주선이나 블랙홀이나 웜홀 같은 건 그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무대에 가까웠다. 그걸 알고 나서부터는 영화 보는 방식 자체가 달라졌다. 과학을 이해하려는 게 아니라 감정을 따라가게 됐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 브랜드 박사의 대사. 처음 들을 땐 그냥 지나쳤는데, 두 번째 볼 때 이 문장이 영화의 주제가 된다는 걸 알았다. — 인터스텔라 (2014)
예상과 가장 달랐던 건 이 영화가 얼마나 "느린" 영화인가 하는 점이었다. 스펙터클한 장면이 없는 건 아닌데,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인물의 감정에 할애한다. 특히 초반부 지구 장면들이 굉장히 길다. 처음 볼 때는 살짝 지루하다고 느꼈는데, 나중에 보면 그 장면들이 없으면 영화 후반부의 충격이 절반도 안 된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초반부가 쌓아놓은 게 나중에 한꺼번에 쏟아지는 구조다, 어쩌겠어.
3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장면들
인터스텔라는 장면 하나하나가 너무 강렬해서 뭘 꼽아야 할지 모를 정도다. 근데 그중에서 지금도 생각하면 뭔가가 조여드는 장면이 세 개 있다.
밀러 행성에서 돌아온 쿠퍼가 오랫동안 쌓인 영상 메시지를 확인하는 장면.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말 그대로 소리를 질렀다. 아이였던 머피가 어른이 되어 있고, 아들은 이미 아버지가 됐고, 손주가 태어났다가 세상을 떴다는 걸 몇 분 안에 보게 된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숫자로 아는 것과, 눈앞에서 그 시간이 쏟아지는 걸 보는 건 완전히 다른 충격이다. 쿠퍼가 화면을 잡고 울 때, 나도 같이 울었다. 이 장면 하나로 이 영화의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고 생각한다, 어쩌겠어.
밀러 행성에 착륙했을 때, 거기서 1시간이 지구 시간으로 7년이 흐른다는 설정. 이걸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막상 그 행성에서 파도에 고립되고 결국 몇 시간을 허비하는 걸 보면서 느끼는 공포가 달랐다. 저 몇 분 동안 지구에서는 수년이 가고 있다는 것. 쿠퍼가 그 사실을 알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장면에서 나는 진짜 답답했다. 그리고 그 답답함이 이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잃어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선택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다.
블랙홀 안의 테서랙트에서 쿠퍼가 시간을 넘나들며 머피의 책장과 소통하는 장면. 이 장면은 처음 볼 때는 무슨 소리인지 잘 몰랐다. 근데 두 번째 볼 때, 영화 초반의 먼지 패턴 장면, 시계 장면, 책이 떨어지는 장면들이 모두 이 장면으로 연결된다는 걸 알았다. 그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이 영화가 얼마나 촘촘하게 설계됐는지를 실감했다. 그리고 그 설계의 핵심이 물리 법칙이 아니라 아버지와 딸의 사랑이라는 게, 이 영화가 다른 SF와 완전히 다른 이유다, 어쩌겠어.
4연출과 배우 — 이건 스케일 영화가 아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을 얘기하면 보통 복잡한 서사 구조나 시간 조작 같은 것들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근데 인터스텔라에서 놀란이 진짜 잘 한 건 감정의 타이밍이었다. 언제 울게 만들지를 정확하게 계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계산이 억지스럽지 않다. 자연스럽게 감정이 끌려간다. 이 조율 능력이 인터스텔라를 단순한 SF 이상으로 만드는 핵심이다.
실제 촬영에 대한 고집도 인상적이다. CG에 최대한 의존하지 않고 실제 세트와 촬영으로 구현한 장면들이 많다. IMAX 카메라로 찍은 우주 장면들이 화면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극장에서 경험한 사람들이 다들 같은 말을 한다. "그게 화면이 아니라 창문처럼 보였다"고. 나는 처음을 집에서 봐서 그 감각을 온전히 못 받은 게 지금도 아쉽다, 어쩌겠어.
매튜 맥커너히는 이 영화에서 내가 본 그의 연기 중 최고였다. 나는 맥커너히를 그전까지 꽤 가벼운 배우로 생각했는데 (댈러스 바이어스 클럽을 못 봤을 때다), 인터스텔라에서의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특히 영상 메시지를 보는 장면에서의 연기는 대사가 거의 없는데도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그 표정 하나가 3시간짜리 영화의 무게를 다 짊어지는 느낌이었다.
앤 해서웨이의 브랜드 박사도 좋았다. 처음에는 조연처럼 보이다가, 영화 중반에 그녀가 사랑에 대해 말하는 장면에서 이 캐릭터가 사실 이 영화의 핵심 주제를 직접 말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 대사 하나가 영화 전체의 방향을 바꾼다고 해도 될 정도다.
5내 나름의 해석 — 사랑이라는 물리 법칙
이 영화에 대한 가장 많은 비판 중 하나가 "사랑이 물리 법칙이라는 설정이 억지스럽다"는 거다. 브랜드 박사가 "사랑은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한다. 근데 나는 그 대사가 억지라고 느끼지 않았다. 왜냐면 이 영화 전체가 그걸 증명하고 있으니까.
쿠퍼가 지구로 돌아갈 이유는 딱 하나였다. 머피. 그 감정이 그를 블랙홀 안으로 뛰어들게 했고, 그 안에서 시간을 거슬러 신호를 보내게 했다. 이걸 "물리적으로 가능하냐"의 문제로 보면 황당하다. 근데 "사람이 극한의 상황에서 무엇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가"의 문제로 보면 완벽하게 이해된다. 이 영화는 과학적 사실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동력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는 거다, 어쩌겠어.
제목이 "인터스텔라"인데, 사실 이 영화에서 별 사이의 공간보다 더 무한한 게 있다. 10년, 20년이 지나도 포기하지 않는 부녀의 신뢰. 그 신뢰가 어떤 물리 법칙보다 강한 힘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나는 그게 억지 설정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삶에서 어떤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건 대부분 누군가 때문이니까.
"사랑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 중에서 유일하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야."
— 브랜드 박사. 처음엔 낭만적인 대사로 들렸는데, 나중에 보면 이 영화의 결론이었다. — 인터스텔라 (2014), 브랜드 박사
- 01 시간이 무기가 될 수 있다 — 우리가 선택한 길은 반드시 누군가의 시간을 소비하게 만든다. 그 책임의 무게.
- 02 사랑은 방향이다 — 쿠퍼가 포기하지 않은 건 의지 때문이 아니라 돌아갈 이유가 있어서다. 이유가 있으면 방법이 생긴다.
- 03 두 번째 볼 때 비로소 완성된다 — 이 영화는 처음 볼 때 SF이고, 두 번째 볼 때 드라마가 된다.
6결론 + 추천 대상
결론은 이거다. "이 영화는 우주 배경의 가족 영화다." SF 장르가 거리감 느껴지는 사람도, 가족 이야기에 감정이 있는 사람이면 충분히 들어올 수 있다. 과학 개념을 100% 이해하지 않아도 이 영화는 전달된다. 오히려 그 개념들을 따라가려고 너무 집중하면 감정의 흐름을 놓칠 수 있다. 그냥 쿠퍼와 머피를 따라가면 된다. 나머지는 영화가 알아서 한다, 어쩌겠어.
반드시 두 번 볼 것을 권한다. 첫 번째는 이야기를 파악하는 데 쓰고, 두 번째는 감정에만 집중해서 봐라. 두 번째에 이 영화가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됐는지가 보인다. 초반부의 작은 장면들이 다 복선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이 영화에 대한 감탄이 한 단계 더 올라간다.
그리고 가능하면 가족 생각이 나는 날 보길 추천한다. 오래 못 만난 사람, 보고 싶은데 거리가 멀어진 사람이 있을 때. 그 감각이 이 영화와 함께 있으면 완전히 다른 무게가 된다. 그게 이 영화가 10년이 지나도 회자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 ✔ 인생 영화를 찾고 있는 사람 — 이 영화가 될 확률이 높다
- ✔ SF와 감동 드라마 둘 다 좋아하는 사람
- ✔ 가족과 거리가 생긴 느낌이 있는 사람 — 이 영화가 뭔가를 건드릴 거다
- ✔ 처음 보고 어렵다고 느낀 사람 — 한 번 더 보면 완전히 달라진다
- ✔ 한스 짐머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 OST만으로도 값어치가 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한 가지 습관이 생겼다. 가끔 오래 연락을 못 한 사람한테 먼저 연락을 한다.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인터스텔라 봤을 때 생각이 나서. 그게 이 영화가 나한테 준 가장 실질적인 영향이다. 좋은 영화는 보고 나서 뭔가를 하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인터스텔라는 그런 영화다, 어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