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이 만든 계급의 지도. 근데 그 지도 위에 내가 있었다는 게 문제란 말이야.
1왜 이 영화를 봤는지 — 솔직한 경험담
솔직히 처음부터 이 영화를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좀 귀찮다는 생각도 있었다. 주변에서 너무 많이 추천을 하니까 오히려 반감이 생겼던 것 같다. "아, 다들 좋다고 하니까 봐야겠지"가 아니라 "이게 뭐라고 이렇게 난리야"하는 마음이 더 컸던 거란 말이야.
그게 2019년인가 2020년 초였는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이 수상 소감 말하는 영상이 계속 떴다. 거기서 이런 말을 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고 마틴 스코세이지를 언급하면서. 그 순간에 묘하게 궁금해졌다. 개인적인 게 뭔데? 이 영화에서 봉준호 감독이 제일 개인적으로 꺼내놓은 게 뭔데? 그게 궁금해서 틀었다. 대단한 동기도 아니고, 그냥 궁금증 하나였다.
사실 그전까지 봉준호 감독 영화를 본 게 살인의 추억이랑 괴물 정도였다. 그것도 "어, 재미있네"하고 끝났지 특별히 깊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근데 기생충은 달랐다. 틀기 전부터 뭔가 마음의 준비를 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포스터 자체가 이미 뭔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고, 트레일러 한 편만 봐도 이게 단순한 오락 영화가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어떤 기대도 아니고 어떤 불안도 아닌 이상한 상태로 영화를 시작했다.
2보기 전 기대 vs 실제로 본 느낌
기대는 솔직히 "잘 만든 영화 한 편"이었다. 아카데미 4관왕이고 칸 황금종려상이니까 당연히 잘 만들었겠지, 근데 그게 나한테 얼마나 와닿을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상 많이 받은 영화가 꼭 내 취향은 아닐 때도 있잖아. 그래서 기대치를 일부러 낮췄다. 그냥 "어 잘 만들었네" 하고 끝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근데 실제로 보고 나서 든 첫 번째 감각은 "이게 지금 뭐야?"였다. 영화가 어느 순간부터 내가 예상한 방향과 완전히 다른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하는데,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영화 중간에 반전이라고 해야 할지, 뒤집힘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순간이 오는데 그 장면에서 진짜 소리가 나올 뻔했다. 혼자 보고 있었는데 "아..." 하고 뭔가를 내뱉었던 것 같다.
끝나고 나서 넷플릭스 화면이 뜨는 순간, 나는 그냥 멍하니 앉아 있었다. 화면에 다음 추천 영화들이 막 올라오는데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방금 내가 본 게 뭔지를 소화하는 데 한참 걸렸다. — 영화를 본 직후의 기억
보통 영화를 보면 "재미있었다" 또는 "별로였다"로 결론이 난다. 근데 기생충은 그 이분법이 통하지 않았다. 재미있었냐고 하면 재미있었는데, 즐거웠냐고 하면 즐겁지 않았다. 무거웠냐고 하면 무거웠는데, 지루했냐고 하면 절대 아니었다. 이 이상한 감정의 복합체가 영화를 보고 나서도 한참 동안 남아 있었다란 말이야.
예상과 가장 달랐던 건 이 영화가 특정 계층을 악인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부자가 나쁜 놈이고 가난한 사람이 피해자다, 이런 단순한 구도가 아니었다.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고 있고, 그 안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기생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더 무서웠다.
3절대 못 잊는 장면들 (구체적으로)
이 영화에는 내가 지금도 떠올리면 뭔가가 조여드는 장면들이 몇 개 있다. 장면 하나하나가 사실 어마어마하게 촘촘하게 설계되어 있어서, 나중에 두 번째로 볼 때 완전히 다른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이 장면 하나로 이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을 거의 다 했다고 봐도 된다. 박 사장네 집에서는 비가 와서 정원 파티가 취소되고, 다혜가 실망한다. 근데 동시에 기택네 반지하 집은 그 비로 인해 물이 차오르고, 화장실에서 오물이 역류한다. 기우와 기정과 기택 엄마가 수해 대피소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그 옆에 박 사장 아들 다송이 보낸 문자가 온다. "저희 비 와서 캠핑 취소됐어요. 선생님도 비 피해 없으셨으면 좋겠어요." 이걸 보는 순간 뭔가가 팍 내려앉았다. 악의가 없는 그 한 마디가 오히려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란 말이야.
사실 이 장면은 영화의 구조 자체를 뒤집어 버리는 순간이다. 박 사장네 화려한 집 지하에, 아무도 몰랐던 또 다른 공간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거기서 누군가가 수년째 숨어서 살고 있었다는 것.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진짜 숨이 멎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이 영화가 보여주는 세계의 층위가 갑자기 하나 더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지하 1층이 있는 줄 알았더니 지하 2층이 있는 거잖아. 계급의 바닥이라고 생각했던 곳 밑에 또 다른 바닥이 있었다란 말이야.
박 사장이 기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냄새가 난다"고 하는 장면. 이게 그냥 지나가는 대사처럼 보이는데, 사실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순간이다. 그 "냄새"가 뭔지, 그 냄새가 어디서 오는지를 기택이 알고 있고 우리도 안다. 그런데 박 사장은 모른다. 모른다는 게 아니라, 알 필요가 없는 위치에 있다. 이 구조가 너무 적나라하게 표현된 장면이라 두 번째 봤을 때는 오히려 첫 번째보다 더 무거웠다.
4연출과 배우 — 이건 그냥 분석이 아니라 감탄
봉준호 감독의 연출 방식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공간을 계급으로 치환하는 방식이었다. 이 영화에서 계단은 그냥 계단이 아니다. 올라가는 방향과 내려가는 방향이 항상 다른 계층의 이동을 나타낸다. 기택네 가족은 항상 내려간다. 반지하에서 시작해서, 계단을 내려가고, 지하로 더 내려가고. 반면 박 사장네 집은 올라가고 또 올라간다. 이 수직적 구도를 카메라가 집요하게 따라가는 방식이 정말 섬세했다.
카메라 움직임 자체도 주목할 만하다. 부자네 집을 찍는 카메라와 가난한 집을 찍는 카메라의 속도가 다르다. 박 사장네 집은 여유롭고 유려한 카메라 무빙으로 담기는 반면, 기택네 반지하는 훨씬 촉박하고 좁은 느낌의 앵글들이 많다. 의식적으로 보지 않으면 모르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분명히 전달된다. 이게 진짜 고수의 연출이라고 생각한다란 말이야.
배우들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송강호는 이 영화에서 어마어마한 연기를 보여주는데, 특히 무표정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장면들이 압권이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그 얼굴 하나로 이 캐릭터의 모든 역사가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조여정도 마찬가지다. 박 사장 부인 연선을 연기하는데, 악역도 선역도 아닌 그냥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너무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그게 오히려 더 무서웠다. 나쁜 의도가 없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구조적 폭력이 이 영화의 핵심이니까.
최우식도 눈에 많이 띄었다. 기우 캐릭터는 어떤 면에서 이 영화를 보는 관객과 제일 비슷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완전히 가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는. 그 애매함을 표정으로 정말 잘 담아냈다고 생각했다.
5내 나름의 해석 — 핵심은 따로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빈부격차 영화, 계급 영화로 읽는다. 맞는 말이다. 근데 나는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강하게 남은 생각이 조금 달랐다. 빈부격차보다도 더 무서운 건, 이 영화 속 어떤 캐릭터도 완전히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거였다.
기택 가족은 나쁜 짓을 한다. 거짓말을 하고, 사람을 속이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밀어낸다. 근데 왜 그랬는지를 알면 미워하기가 쉽지 않다. 반대로 박 사장 가족은 착하다. 직접적으로 누군가를 해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선량함"이 유지되는 구조 자체가 이미 누군가를 착취하고 있다. 이걸 봉준호 감독은 단 한 마디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보여준다. 그게 더 충격적이었다란 말이야.
그리고 이게 나한테 너무 직접적으로 와닿은 이유가 있다. 나도 완전히 부자가 아니고 완전히 가난하지도 않은 애매한 위치에 있다는 걸 평소에 느끼거든.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사람들이 이 구조 안에서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를 이 영화가 너무 잘 보여준다. 나도 어떤 상황에서는 기택이고, 어떤 상황에서는 박 사장이 될 수 있다. 그 생각이 가장 무서웠다.
"계획이 없으면 어떤 것도 잘못될 수 없다."
기우가 근세에게 하는 이 대사가 사실 이 영화 전체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계획이 있기 때문에, 희망이 있기 때문에, 뭔가를 바라기 때문에 비극이 시작된다. — 기생충 中 기우의 대사
영화 제목 "기생충"이 결국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를 마지막에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기택 가족이 박 사장네에 기생하는 건 맞다. 근데 박 사장네도 기택 가족이 없으면 그 생활이 유지가 안 된다.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에게 필요하고, 그러면서 어느 쪽도 그 관계를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는다.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구조와 얼마나 닮아 있는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좀 섬뜩하다란 말이야.
- 01 악인이 없는 비극 — 시스템이 만들어낸 폭력은 특정 개인을 탓할 수 없기 때문에 더 무섭다.
- 02 냄새는 계급을 증명한다 —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흔적이 사람을 구분한다.
- 03 지하에는 항상 또 다른 지하가 있다 — 내가 바닥이라고 생각한 곳 밑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공포.
6결론 + 추천 대상
결론을 한 줄로 말하면 이거다. "이 영화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 근데 그 불편함이 나쁜 게 아니라, 내가 외면하고 있던 걸 정면으로 마주친 느낌이었다. 이런 영화가 나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봉준호 감독이 이걸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지도 다시 한번 느꼈다란 말이야.
두 번 보는 걸 강력하게 추천한다. 처음에는 이야기를 따라가느라 놓치는 것들이 너무 많다. 두 번째에 봤을 때 첫 번째에 당연하게 지나쳤던 장면들이 전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는데, 그때 이 영화에 대한 감탄이 한 번 더 온다.
다만 기분 전환용으로 보기는 좋지 않다. 재미있지만 가볍지 않고, 볼 만하지만 편하지 않다. 영화를 보고 나서 뭔가를 생각하고 싶은 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 ✔ 현실적인 사회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
- ✔ 영화를 보고 나서 오래 생각하고 싶은 사람
- ✔ 봉준호 감독 특유의 연출 방식이 궁금한 사람
- ✔ 나도 이 구조 안에 어디쯤 있을까 생각해본 적 있는 사람
- ✔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세 번 봐도 새로운 영화를 원하는 사람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 달라진 게 있다면, 가끔 내가 서 있는 위치가 어딘지를 생각하게 됐다는 거다. 위를 보면 올라가고 싶고, 아래를 보면 불안하고. 그 불안이 사실 이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라는 걸 기생충이 제일 정직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그게 왜 이 영화가 전 세계에서 통했는지의 이유가 아닐까. 한국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동시에 누구나 자기 얘기처럼 느낄 수 있는 구조 — 그게 기생충이다란 말이야.